2018. 3. 5. 07:50ㆍUI 가벼운 이야기
이번 글에서는 죽음의 경험을 디자인한 사례들을 소개합니다. 2017년 3월 그린위치 대학교(University of Greenwich)에서 열린 “죽음을 디자인하다: 21세기에 풀어야 할 과제와 미학 (Designing Death: Challenges and Aesthetics for the 21st Century)” 세미나에 참가한 경험과 참고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들어가면서
죽음을 디자인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 임종하는 시간, 장례식을 각자의 바람대로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관습을 새로운 눈으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넓게 보자면 호스피스나 장례 이후의 애도도 포함합니다.
내가 원하는 장례식
우리의 장례문화는 사람들이 자신의 장례식에서 바라는 것을 충족시켜주고 있을까요? 2016년에 서울의료원의 장례문화 서비스 디자인팀은 사람들이 바라는 장례식에 관한 설문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설문에 따르면 시민들은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간소한 예식을 원하고, 장례식을 통해 고유한 삶의 색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장례를 치르는 바쁜 일정에 맞춰 상조회사가 정해주는 음식, 장소, 절차를 따라가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서 여러 스타트업과 디자이너들이 고유한 삶을 담는 장례식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대화하기 어려운 주제
죽음에 관해 대화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2015년 Comres 사는 영국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죽음에 관한 대중 인식’에 관하여 설문을 했습니다. 응답자 80% 이상이 자신이 원하는 임종에 관한 뚜렷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족에게 임종에 대한 바람에 관해 물어본 응답자는 20%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좀 더 가까운 일본의 설문 결과를 볼까요. 2013년 일본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벌인 설문에서 55%가 ‘내 죽음이 임박했을 때 내가 바라거나 바라지 않는 의료 문제에 대해 가족과 대화한 적이 없다’고 응답했습니다. 한국의 통계는 찾지 못했지만, 영국인의 유언장 작성 비율이 30%를 웃도는 데 반해, 한국인의 유언장 작성 비율은 3~5%라고 합니다(참고). 죽음에 관해 대화를 꺼리는 현상은 한국과 일본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예상해 봅니다.
우리는 죽음에 관해 대화하며 어떻게 장례식을 치르고 싶은지 생각하고 공유하게 됩니다. 만약 갑자기 사고를 당하거나 급격하게 병세가 악화되면 어떻게 될까요? 가족들이 당사자 대신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선택한 방식이 당사자가 원하는 방식인지를 고민하며 큰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당사자도 본인이 원하지 않는 완화 치료나 장례식을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례 1. Death Cafe (http://deathcafe.com/)
Death Cafe는 죽음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비영리 이벤트입니다. 12명 남짓한 서로 처음 보는 사람들이 모여서 차와 케이크를 먹으며 2시간 동안 죽음에 관해 대화를 나눕니다. 스위스 사회학자인 Bernard Crettaz가 2004년 처음 주최한 Cafe Mortel을 시작으로, 2011년까지 52개국에서 5,787번의 Death Cafe가 열렸습니다. 특정한 장소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레스토랑이나 카페, 집을 빌려서 죽음에 관한 대화의 장을 열면 그곳이 Death Cafe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쉽게 Death Cafe의 주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웹사이트의 안내문을 보고 따라 하기만 하면 되는데, 2가지 방식으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가 질문을 던지는 방식, 혹은 진행자 없이 참여자들이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식입니다. 흥미롭게도 안내문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죽음에 관해 대화하기 위한 준비물로 케이크와 차, 커피를 꼭 준비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Death Cafe의 목적은 죽음에 관해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는 것입니다. 대화를 통해 죽음에 대한 터부를 넘어서게 됩니다. 가족에게 자기 죽음에 관련된 소망에 관해 이야기할 용기를 가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감정을 건강하게 표현할 기회도 가집니다.
사례 2. Poetic Ending (https://www.poetic-endings.com)
새로운 장례식은 과거에 우리가 참석했던 장례식과 같을 필요가 없습니다. 고인의 삶을 진실하게 나타내는 새로운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 Poetic Ending 소개 글 발췌
Poetic Ending은 고인에 대한 맞춤형 장례식을 만들어주는 서비스 사례입니다. Poetic Ending은 패션 디자인 전공자가 설립한 장례 컨설팅 회사입니다. CEO Louise는 판에 박힌 장례식을 통해서는 더 사람들이 적절히 죽음을 애도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나날이 줄어드는 영국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적 장례 예식을 통해 슬픔을 달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장례식 절차는 종교적 관습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을까요?
(1) 고객 상황 이해
Louise의 장례 컨설팅은 고객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우선 장례식을 하기로 하면 Poetic Ending으로부터 이메일을 통해 일련의 질문지를 받습니다. 고객은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게 되고, 어떻게 가족과 이별할지 생각하게 됩니다. Poetic Ending은 응답지 외에도 직접 대화를 통해 고객이 어떤 상황에 부닥쳐있는지, 얼마만큼의 예산을 가졌는지 등에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좋은 장례 디자인은 사용자의 감정과 상황에 대한 진솔한 공감에서 시작합니다.
(2) 맞춤형 선택지 제공
Poetic Ending에서는 사용자가 원하는 옵션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제공합니다. 관, 예식, 장소, 이동수단까지 예산과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Louise는 직접 장례 지도사로 일하면서 기존 상조업의 불투명한 운영 방식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에, Poetic Ending에서는 가격을 투명하게 표기하고 과거에 친분을 다진 장례식장 운영자 및 예식 지도사들과 협력하여 사용자들이 원하는 옵션을 만들었습니다.
(3) 고인을 위한 시와 노래
Poetic Ending에서는 고인의 삶을 담은 시나 노래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장례식을 치르는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지도사를 선택합니다. 장례 지도사들(Celebrant)은 고인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고인에 대한 가족의 기억을 예술과 문학으로 승화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유한 예식의 틀을 만들기도 합니다.
Louise는 어떻게 기존에 없던 새로운 서비스를 디자인했을까요?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Poetic Ending 서비스의 핵심은 각자가 편하게 느끼는 만큼만 장례 과정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회사가 장례문화의 웨딩 플래너가 되는 것도, 장례식을 신나는 파티로 만드는 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가져오는 복잡한 감정을 각자에게 맞는 속도와 방법으로 소화하게 도와주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사례 3. 내가 마지막으로 듣는 소리 (http://www.sensound.space/)
What’s the last sound you wish to hear?
당신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소리는 무엇인가요?
- Yoko, Ambient electronic musician
병원에 장기간 입원하게 된 전자 음악가 요코는, 병원의 '소리 디자인'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녀는 병원의 알람 소리가 환자의 회복을 방해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견하고는, 새로운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간단한 해결책은 병원의 '삐-'하는 알림음을 화음에 맞게 조율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래 비디오 참고)
The Future of Hospital Sound from Yoko K
요코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느끼는 감각이 청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병원의 알림 소리나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듣게 될 소리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녀는 OPEN IDEO와 협력하여 40명의 환자가 병원에서 어떤 소리를 듣고 어떤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지 인터뷰했습니다. 그리고 2016년 10월, San Francisco의 End of Life Conference에서 인터뷰에서 만난 사람들의 목소리와 그들이 죽기 직전 듣고 싶어 한 바닷소리,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와 웃음소리 등을 엮어서 공연했습니다. (공연 영상 참고 - My Last Sound)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앞으로 우리는 임종 경험을 의학적 관점에서 확장하여 시각, 청각, 후각의 감각 경험, 더 나아가 공간이나 감정, 기억을 총체적으로 고려하여 디자인하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마치면서
디자이너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정신적 고통을 덜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더 나은 의미를 찾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영국 디자인 카운슬의 Mat Hunter는 “특히 죽음과 관련된 디자인에서는 영향력 있는 큰 변화보다는 ‘한계적 변화(incremental change)'가 중요합니다. 겸허한 자세로 귀 기울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작은 부분부터 섬세하게 노력한다면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죽음 너머의 즐거움을 발견하도록 이끌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죽음을 둘러싼 영역에서 그동안 침묵해왔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떤 새로운 디자인 기회로 다가올지 기대됩니다. 현재 서울의료원은 서울의 장례문화를 다시 디자인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2017년 말에는 국내에서 장례문화를 다루는 스타트업이 2개 생겨났습니다. 죽음에 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누도록 도와주는 디자인 장치가 좋은 장례 디자인의 관건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포스트를 마칩니다.
스타트업
- 대장정
- 페어웰
컨퍼런스
- End Well Symposium: Design for the End of Life Experience
(San Francisco, USA / 2018. 12. 06)
기사/통계
- Being and Dying Design Research Group
- OPEN IDEO End of Life Design Challenge Stories
- Design Council, 21세기에 죽음을 재창조하다
- Queensland Gov, 왜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게 중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