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하라 켄야 심포지엄 'Ex-formation Seoul X Tokyo'
2013. 5. 16. 00:02ㆍGUI 가벼운 이야기
지난 4월 26일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주최하고 윤디자인 연구소가 주관하는 'Ex-Formation Seoul X Tokyo 심포지엄'에 다녀왔습니다.
이 날의 심포지엄은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하라 켄야가 도쿄의 무사시노대학에서 10년여 동안 'Ex-Formation'이라는 주제로 진행해 온 수업의 결과물들을 발표하는 1부와, 이나미-스튜디오 baf 대표, 한명수-SK 커뮤니케이션스 이사, 김경균-한예종 미술원 교수와 청중들이 발표 내용에 대해 질문하고 하라 켄야가 답하는 2부로 진행되었습니다.
하라 켄야는 연구의 결과물들을 보여주기에 앞서 Ex-formation의 큰 개념부터 설명해주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정한 정보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Ex-formation은 하라켄야가 직접 만든 개념으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Information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Information이 상대방에게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개념을 알게하는 것'이라면 Ex-formation은 상대방이 '지금까지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이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각성시킴으로써 대상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방식입니다. 정보를 억지로 주입시키는 것보다 훨씬 신선한 접근 방식으로, '알고 있다'는 '기지화'의 자의식에서 벗어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대상을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과 같은 '미지화'의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저 역시 작품들을 보면서 이와 같은 경험을 느꼈습니다.
하라 켄야는 현업에서 활동할 때의 상업적인 디자인과는 다르게 교육자의 입장에서는 좀 더 떨어져서 순수한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학생들과 같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수업의 결과물들 중, 인상 깊었던 주제와 작품을 소개합니다.
종이컵
종이컵을 자르거나, 구기거나 찢는 등의 변형을 가한 것들과 변형하지 않더라도 쌓거나, 정렬 방식을 새롭게 하는 등의 연출을 통해서 일상의 물건이 새로운 대상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특히, 종이컵에 구기고 그 위에 그래픽으로 암벽의 텍스쳐를 표현한 작품은 주변의 물건에 조금의 아이디어를 첨가하면 전혀 다른 가치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 신선했습니다.
시만토 강
이미지 출처 http://threads.moss-pultz.com/2009/02/05/making-things-unknown/
시만토 강은 일본인들에게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으로 인식되고 있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나도 그 강을 알고 있다.'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 프로젝트를 본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시만토 강에 대한 기지화가 처음 보는 대상으로 느껴지는 미지화를 겪었을 것 같습니다.
강은 종이컵과 다르게 한 눈에 보기 힘들고 자유자재로 만질 수 없으므로 스토리를 통해 풀어 낸 작품이 많았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은 강이 시작되는 상류부터 하류까지의 수면 부분을 아스팔트로 합성하여 차도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었습니다. 각 차선의 넓이, 아스팔트 입자의 크기, 선의 굵기 등을 실제의 규격으로 작업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원래의 강이 하나의 도로처럼 보이게 됐고, 스케일 또한 한 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리조트
일상의 사물을 리조트를 연상시킬 수 있도록 표현한 프로젝트입니다.
도시의 표지판이나, 바퀴, 횡단보도 등에 비닐과 스트라이프를 입히면 리조트의 느낌이 나는 작품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밖에서 자는 행동만으로 리조트의 느낌을 나타낸 학생의 작품이 기억에 남습니다.
아이스크림
딱딱해 보이는 제복과 무표정의 인물이 아이스크림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 부드럽고 착한 인상을 갖게 됩니다. 아이스크림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이용한 색다른 작품이었습니다. 다른 작품에서는 자신만의 노즐을 만들어서 낯선 소프트 아이스크림의 모양을 만든다든지, 콘을 먹는다는 것도 중요하고, 보는 이가 콘 안에 아이스크림이 꽉 차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 궁극의 콘 모양을 디자인한 작품이 재밌었습니다. 행동을 관찰하고 발견한 점을 오브제에 응용하는 과정은 보는 것 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주름
세계 곳곳에 우편물을 보내고 반송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생기는 주름을 모은 작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신체를 석고로 떠서 섬의 모습으로 표현한 작품이 있었는데, 신체의 주름과 자연의 주름이 서로 비슷한 요소가 많다는 의외의 발견에 대한 미지화를 경험했습니다. 이 외에 아이스크림이 한번 녹았다가 다시 얼면 비닐봉지 모양에 따라 주름이 생기는 것에 영감을 받아, 아예 처음부터 주름이 있는 아이스크림을 만든 작품, 강과 도로를 나라의 주름이라고 생각하고 일본 지도에 강과 도로를 모두 표시하는 작품은 또 다른 자극이 되었습니다.
알몸
하라 켄야는 매년 학생들이 흥미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들을 펼쳐놓고 논의한 후, 여러 차례 투표를 거쳐 주제를 정한다고 합니다. '알몸'이라는 주제는 에로스나 수치심 등을 연상시킨다는 것 때문에 다루기 힘든 주제라고 생각했지만 '벌거벗은 것을 벗겨보자.'라는 관점에서 연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나체 인형'이라는 작품은 '알몸은 왜 부끄러울까?'라는 물음으로 시작됐다고 합니다. 학생은 '남들과 달라서 비교되기 때문'이라는 통찰력으로 기존의 정형화 된 인형의 모습을 개인의 편차에 중점을 둔 컴플렉스 인형으로 변형했습니다. 또 다른 작품으로는 일상의 사물(장도리, 포크, 스패너, 달걀, 피망 등등)에 팬티를 입힘으로써 사물을 신체로 보이게 하는 '의인화'작업이 있었습니다. 팬티를 입히기 전에는 단순한 사물에 불과했던 것들이 팬티를 입게 되면 사람과의 유사성을 띄면서 공감을 이끌어 냈습니다. 알몸의 Ex-formation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지표의 알몸을 표현한 작품이었는데, 바다라는 의복을 벗겨 낸 역동적인 지표의 알몸을 정밀한 모형으로 표현했습니다. '바다=의복, 지표=몸'이라는 발상의 전환도 놀라웠고, 우리가 항상 보아왔던 바다를 포함 지구의 모습과 다른, 알몸의 지구를 보는 것도 신선한 Ex-formation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주제 외에는 식물, 여자, 공기에 대한 Ex-formation 연구들이 있었습니다.
2부의 토론은 주로 하라 켄야의 교육 방식과 철학, 수업 진행에 관한 질문들 위주로 이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Ex-formation이라는 개념 자체를 좀 더 깊이 있게 토론하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반면, 교육자로서의 하라 켄야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질의 응답 시간 초반에 한명수 이사의 질문이 가장 공감되었는데요, Ex-formation도 사고를 확장하는 방법론 중에 하나일텐데, 이런 창의적인 방법도 10년 동안 진행해 오면서 이런 것은 안된다든지, 이런 틀은 깨야된다는 등의 고민, 고착화 된 패턴 등은 없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하라 켄야는 Ex-formation이라는 방법론이 아직 틀을 깰 정도까지 진행되지 않았고 오히려 틀을 깨야 한다는 필요성이 느껴지는 일반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만으로 좋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또한 아트 디렉터로서의 하라 켄야, 교수로서의 하라 켄야의 다른 면모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교수와 아트 디렉터는 전혀 다른 캐릭터이기 때문에 문제 해결에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트 디렉터로서는 공포감을 조성할 정도로 엄격하지만 학교에서는 잘 안풀리는 학생도 좋은 점을 뽑아내서 칭찬하고 포용하는 좋은 선생님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라 켄야가 디자인을 가르치는 목적, 또는 직접 디자인하는 자세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회 전체에 디자인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아져서 디자인적 사고를 갖고 살아가기 위하는 것과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은 디자인되어 있는데, '이게 디자인이 되어있구나'를 깨닫는 지성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합니다.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의 차이를 시작적인 결과물을 통해 느꼈습니다. 그리고 디자이너로서 대상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다가가는 것 자체가 중요하고,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의 소중함도 알게 됐습니다. 빨리 생각하고 빨리 정답을 내는 패러다임의 세상에서 좀 더 깊게 사유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본 시간이었습니다.
하라 켄야 홈페이지 http://www.ndc.co.jp/hara/en/
타이포그라피서울 인터뷰 http://www.typographyseoul.com/index.php?mid=media&document_srl=399406
[참고##전시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