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문제를 게임으로 풀어내다 - 놀공과 함께한 프로젝트 '어루만지다'

2014. 12. 18. 01:00pxd 프로젝트 리뷰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년 4월 16일, 진도 해상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잊지 못할 대참사가 벌어진 날입니다.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들을 포함한 477명이 탑승한 세월호가 침몰한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무기력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pxd사람들 또한 한동안 무기력감에 시달리며 한탄하던 끝에, ‘UX 디자이너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를 고민해 보는 자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1. ‘어루만지다’ 프로젝트의 시작

이 프로젝트는 세월호 사건 같은 사고가 일어나기 전 혹은 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고민해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시작했습니다. 첫 회의에서는 희생자 유가족 혹은 지인들을 위한 심리치료 가이드, 긴급 재난 대피 메뉴얼, 희생자 유가족 거처 개선 문제 등이 논의되었습니다. 이후 회의를 통해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방향으로 고민한 끝에 아직 판단력이 미숙한 어린이와 청소년 입장에서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재난 대피 요령을 익히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으로 교육용 보드게임을 만들어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pxd의 세월호 프로젝트 ‘어루만지다’ 가 시작되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이라는 민감한 이슈로 진행된 일이기 때문에, 아이디어를 제시하거나 방향을 정하는 일 등 모든 과정에서 무척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프로젝트 시작의 발단이었고 진행하면서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졌지만, 이 프로젝트를 보시고 사고와 관련된 어떤 분이라도 좋지 않게 받아들이실 때에는 바로 폐기할 의사가 있다는 점을 밝혀둡니다.]


2. 아이디어의 전개

우리는 우선 보드게임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습득하고 아이디어를 프로토타이핑해 보는 것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그 결과로 제작해 본 초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 선박 형태의 보드 위에 방에서부터 갑판(외부)로 탈출하는 길을 따라 플레이어가 진행합니다.

- 특정 칸에 걸리면 상황 카드가 주어집니다. 상황 카드는 선박 사고에 따라 벌어지는 특수한 상황들로, 이에 올바르게 대처해야 진행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 마지막으로 탈출에 성공하기 위해선 구명보트가 있는 통로로 나와 구명보트에 탑승헤야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습니다.

이 프로토타입에서 플레이어가 학습하도록 의도한 부분은 선박 구조에 대한 인지와 재난 상황에 따른 적절한 대처 요령입니다. 그러나 리서치한 결과, 실제 재난시 ‘상황’과 그에 대한 ‘정답’이 생각처럼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상황이란 변수가 너무나도 많고, (세월호 사건과 달리) 개인의 대처 요령보다는 승무원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 전체의 안전을 위해서 더욱 바람직한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 프로토타입 제작 이후 많은 고민이 생겼습니다. 앞으로 프로젝트의 목적을 단순히 재난 상식을 ‘재미있게’ 배우는 것에 초점을 둘 것인지, ‘정확한’ 재난 상식을 학습하여 실제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또 보드게임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다른 플레이어와의 경쟁을 통해 얻는 승리’가 강력한 재미요소인데, 재난 상황이라는 설정에서 다른 플레이어와의 경쟁이 우리의 의도를 왜곡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전문적인 재난 상식을 학습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보드게임보다 텍스트가 효과적일 것이고, 이미 관련 전문 도서나 웹사이트에서 잘 되어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또한 당장 보드게임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보기엔 보드게임 제작에 대한 노하우가 없었고,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게임이라는 형태로 어떻게 전달해야 할 지 막연했습니다.

현실적인 고민 끝에 보드 게임보다 간단한 수준으로 만드는 방안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갖고 있는 정보들을 카드 타입으로 만들어 문제를 맞추면 점수를 내는 모바일게임 방식입니다. 그러나 막상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보니 재난 상황시 일반인 수준에서 알아야 할 정보의 양이 많지 않아 정보만 이용하여 게임으로 만들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미궁에 빠진 시기에 놀공발전소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3. 놀공과 함께하다


1) 게임이 되기 위한 조건 "몰입"

놀공발전소는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게임으로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주는 곳입니다. (참고 : http://story.pxd.co.kr/784) 어느 더운 여름날, pxd는 게임의 전문가인 놀공을 찾아가 지금까지의 아이디어와 프로토타입을 소개하고 놀공의 의견을 구했습니다. 놀공은 pxd의 아이디어를 듣고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할지 새로운 프레임에서 제시해 주었습니다.
- 퀴즈 타입은 정보 전달일 뿐, 게임을 만들기 위해선 몰입이 되어야 한다.

- 몰입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정보에 용도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게임의 최종 목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 현실의 소재(선박 침몰 등 재난 상황)이지만 게임은 현실과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추상화를 시켜야 한다.

- 퀴즈 타입은 정보 중심적이다. 메시지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개인의 경험으로 만들어야 한다.
-> 방향 : 추상화를 시키되, 정보는 가급적 배제하고 (플레이어의) 선택과 가장 중요한 감정상태에 집중하자.

놀공은 경험에서 나온 게임 설계 노하우로 지금까지 가져왔던 게임에 대한 관점을 확장시켜 주었습니다. 놀공은 상황을 만들어 주고 그것에 몰입하게 한 뒤 플레이어가 직접 선택을 내림으로써 상황에 대한 이해를 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제시했습니다. 게임화된 상황 속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겪는 감정과 선택을 통해 실제 상황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게임으로 재난대피 교육을 대신할 순 없다고 판단하고, 게임을 통해 상황에 몰입해본 후 기존의 안전교육을 받는다면 이해도, 집중도가 훨씬 높아질 것이란 생각이었습니다. pxd도 이에 동의하여 놀공과 함께 다양한 아이디어를 전개해 나갔습니다. 구체화된 방향을 갖고 생각을 나누자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 대상에 대한 관점을 바꿔 구조요원 입장에서 플레이하는 구조 게임

* 필요한 도구와 인원을 적절한 타이밍과 적절한 장소에 배치하는 배치 게임

* Collectable Card Game 형태로 만들어서 정보 카드를 게임진행에 필요하게 만들어서 플레이어가 그 정보를 원하도록 하는 게임

* 위층(관찰하는 곳)과 아래층(플레이하는 곳)이 있어서, 그룹을 나누어 턴에 따라 플레이하는 게임. 자신의 턴이 아닐 때 위층에서 아래층 플레이어들이 대피하는 모습을 관찰한다.

* 서로 타인의 역할을 하게 하는 Role play 게임


첫번째 만남 이후 pxd와 놀공은 서로 할 수 있는 부분을 진행하며 함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기로 했습니다.


2) 계속되는 목표 고민 "우리는 이 게임으로 뭘 하고 싶은 걸까?"

게임 설계에 대한 아이디어는 많았지만 한동안 우리는 이 프로젝트의 목표를 점검하며 많은 고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막연히 세월호 사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였기에 목표가 재설정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왜’ 를 우선적으로 정의하고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 누가 플레이할 것인가
- 어떤 메시지를 경험하게 할 것인가
- 이 게임으로 무엇을 얻게 할 것인가

프로젝트의 타겟은 아직 판단력이 미숙한 초, 중학생으로 결정하고, 목표는 이들의 안전 의식의 함양과 인식 개선을 목표로 잡았습니다. 막연히 자신과 먼 일이라고 생각하던 재난/사고를 게임을 통해 경험함으로써 경각심을 갖게 해 주는 것입니다. 큰 목표를 정의하며 우리는 대상을 선박사고에서 모든 종류의 재난/안전사고로 확장했습니다.

그러면 현재 가지고 있는 안전에 대한 의식을 게임을 통해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는 현재 학교 또는 공기관에서 실행하고 있는 안전교육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학생 두 명, 그리고 119대원 한분(초등학생 소방교육 담당자)과 간단한 파일럿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결과 현재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이루어지는 안전교육은 거의 없으며, 있는 학교의 경우는 메뉴얼식의 대피 연습을 실행하는데, 학생들은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반면 초등학생 대상으로 실시하는 소방교육은 구체적인 상황 설정과 몸으로 배우는 방식을 추구하여 높은 효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효과적인 안전교육은 어떻게 시행되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더 알아보기 위해 해외의 안전교육 사례를 조사하고 두 명의 중학생을 만나 현재 청소년들의 안전 의식 수준을 알아보기 위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해외조사 결과 캠프 형태로 이루어지는 재난체험교육이 인상깊었습니다. 주로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에서 이루어지는 이 캠프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장시간 실제 재난상황과 동일하게 숙식하며 생활하도록 하는 형태입니다. 1박2일의 시간 동안 청소년들은 자신이 먹을 것과 생활할 곳을 타인과 협동하여 스스로 마련해야 합니다. 다른 여러 안전교육과 차별되는 점은 단순히 가이드에 따라 행동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책임지고 타인과 협동해야 하는 상황에서 본인이 갖는 책임감과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로 참여자는 단순한 재난 대처 요령을 학습하는 것 이상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반대로 맥락 없이 제공되는 가이드만 따르는 교육들은 그 시간이 지나가면 효과를 보기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효과적인 안전교육의 핵심을 상황에 대한 ‘몰입’과 대상자의 ‘주체적 경험’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핵심을 우리 게임에 녹여내고자 했습니다. 정리하자면 우리 게임의 최종 목표는 ‘안전 의식을 본인의 책임감과 역할의 중요성을 체험하며 깨닫도록 하기 위해 게임 속에서 몰입을 통해 경험하게 한다’ 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게임요소 발견, 그리고 프로토타이핑

목표가 어느 정도 구체화되고 나서, 우리가 가진 정보들이 어떤 게임요소가 될 수 있는지 정리해 보기로 했습니다. 도시 재난 상황에서 필요한 요소들을 5가지 키워드로 정리했을 때 ‘대피로(동선)’, ‘안전 기물’, ‘상황 판단’, ‘마인트 컨트롤’, ‘공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었습니다. 마인드 컨트롤 같은 의식적인 부분은 게임으로 단시간에 이루어지기 어려운 반면, 안전 기물의 경우 종류가 다양하고 각각의 설치 기준이 뚜렷하여 게임화를 시도하기에 좋은 요소였습니다.

논의 끝에 도달한 컨셉은 ‘안전한 우리 도시’로, 실제 지역을 메타포로 삼아 도시의 모습을 축소화한 보드에 필요한 안전 기물들을 확보하고 재난(화재, 지진 등)이 일어났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임입니다.

- 도시 설계자인 플레이어는 안전 기물을 구매하여 도시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배치합니다. 

- 안전 기물은 각각 필요한 위치에 반드시 있어야 그 역할을 할 수 있고, 빠르게 대피할 수 있는 동선을 확보해야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습니다.

- 재난은 설계된 도시 내 언제어디에서 발생할지 모릅니다. 재난 대비를 제대로 해 놓지 않은 지점에 재난이 발생할 경우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 반대로 열심히 재난대비를 해 놓은 지점에 재난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플레이어는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게 되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을 궁리하게 되는 게임입니다.


기존에 생각했던 대피 게임의 경우 플레이어가 몰입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실제 상황처럼 느껴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일본의 재난 체험 캠프 사례와 같이 시간적/공간적 맥락과 플레이어의 물리적인 활동이 기반되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반면 위와 같은 설계 게임은 게임화를 통해 충분히 몰입이 가능하고, 플레이어가 어느 정도 상황 컨트롤이 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설계한 도시에 대해 ‘주체적 경험’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어 게임의 프레임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본 프로젝트는 놀공발전소의 다른 프로젝트와 겹치게 되어 본격적인 설계로 이어지기 전에 중단되었습니다. 그 대신 pxd는 놀공과의 인연을 또 다른 방식의 협업으로 이어가는 중입니다.)


4. 글을 마치며

본 프로젝트는 어떤 관점에서 문제 정의를 하느냐에 따라 다른 솔루션이 나올 수 있는 광범위한 주제였기 때문에, 우리는 진행 내내 전진했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목표 정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우리가 이걸 통해서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가 주된 고민이었습니다. 목표를 좁힐 수 있었던 것은 '게임화로 풀 수 있는 문제' 에 집중하면서였습니다. 게임을 통해 대상자가 주체적으로 경험하는 교육은 외부로부터 전달받는 일반 교육에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교육과 목표도 결과물도 달라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놀공과 함께 토론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게임으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크게 확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게임이라는 매체로 타인의 의식에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우리의 시도가 마치 영화 ‘인셉션’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인셉션의 의미는 타인의 꿈 속에 몰래 들어가 그 안에서 특정한 경험을 하게 해줌으로써 깨어났을 때 그 경험으로 인한 생각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인셉션에서의 꿈처럼 게임 또한 현실이 아니지만, 게임에 몰입하면서 경험한 내용이 게임이 끝난 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 게임은 강력한 ‘인셉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pxd와 함께 본 프로젝트에 열정적으로 참여해 주신 놀공발전소에 감사의 말씀 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놀공발전소 홈페이지 : http://www.nolgong.com/

[참고##서비스 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