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하는 디자이너 - 헬스 편

2019.09.26 07:50pxd 다이어리 & 소소한 이야기
by 이 재용


나는 운동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

운동을 굉장히 잘하는 건 아니지만, 달리기도 제법 잘하는 편이고, 순발력도 있는 편이다. 하지만 운동이 싫다. 머리를 쓰는 것은 재밌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은 싫다.

운동도 싫지만, 운동에 관해서 글 쓰는 것도 싫다. 대체 뭐라고 써야 할 건가? 그냥 이렇게 계속 싫다 싫다만 쓸 수는 없지 않은가. 대체 왜 이런 글이 피엑스디 블로그에 실려야 하는가? 디자이너와 운동이 대체 무슨 관계인가? 근육으로 디자인하는 건 아니지 않나? 하지만 위승용 님이 쓰라고 지목해서 할 수 없이 쓴다. 인생이 그런 거 같다.

어렸을 때 태권도를 배웠고, 성인이 되고 난 다음에 수영도 여러 차례 배웠다. 달리기, 배드민턴, 탁구, 당구 조금씩 해 봤지만, 가끔 하는 건 몰라도 정기적으로 하는 건 괴롭다. 

처음 헬스를 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피엑스디에는 안식 휴가가 있다. 내가 아내한테 안식 휴가 때 달리 할 일도 없으니 그냥 회사에 출근하겠다고 하자 아내가 그러면 낮에 운동이라도 하라는 조건을 걸었다. 평소에 시간 없어서 운동 못 한다고 핑계를 대 왔으니 이번엔 핑계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버렸다. 그래서 처음 헬스장에 간 것이 2012년 4월이다. 그리고 8년째 하고 있다.

 

 


내가 하는 운동이 무엇인지 모른다

헬스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퍼스널 트레이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웨이트 트레이닝이라고 부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냥 나는 가서 선생님이 이걸 들으라고 하면 들고, 내려놓으라고 하면 내려놓는다. 

누워서 무언가를 들기도 하고, 앉아서 당기기도 하고,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느낌은 '벌서기'다. 어렸을 때, 무슨 잘못인지도 모르고 단체로 벌을 서면 무거운 것을 들고 있거나, 앉았다 일어나기, 엎드렸다가 일어나기 뭐 이런 거를 반복하거나 하는 등의 벌을 섰는데, 헬스를 하면서 놀란 사실은, 그런 벌들이 모두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모두 '영어'로.

내가 깨달은 운동의 본질은 근육과 허파에 고통을 느끼면서 괴롭힘 당하기다. 

 

 


디자이너는 그리고 직장인은 왜 운동을 해야 할까?

특별히 운동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저 질문에 어쩔 수 없이 대답하는 포맷이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운동을 하며 얻은 것 혹은 깨달은 것을 적어 본다. 

 

1. 인생은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2019. 5. 12

PT 선생님: (다른 얘길 하다가) 운동이 회원님 인생에 미친 영향이 대단하지 않나요?

나: 엄청나죠. 저는 매번 운동하면서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버티면 결국 시계는 간다'가 가장 큰 교훈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네요. 살면서 괴로울 때마다 운동을 떠올리며 참습니다.

PT 선생님: 흠.. 보통 남들은 군대에서 배우는 교훈을... 그렇게 괴로우신가요?

나: 괴롭죠. 언제나 운동하면서 마음속으로 '내가 평소에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렇게 고통 속에 살아야 하나, 인생이란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인가?'라고 끊임없이 되묻습니다.

 

2018. 8. 4

PT 선생님: 회원님은 스트레스받을 때 어떻게 푸시나요?

나: 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운동으로 푸는 것 같습니다.

PT 선생님: (감격해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정말요? 마침내 회원님도 운동의 진정한 가치를 느끼시는군요!

나: 음... 그거라기보단, 제가 스트레스받을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 보니 항상 운동하기 전에 제일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리고 운동이 끝나면 그 스트레스가 없어집니다. 그러니 제가 받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운동으로 푸는 것 같네요!!!

 

 

2.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생각을 해 본다.

2015. 6. 23

PT 선생님: 한 번만 더 해 보세요

나: 정말 더 못 하겠어요.

PT 선생님: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하세요!

나: 제가 왜 제 자신과 싸워야 하죠??? ㅠㅠ

 

2018. 11. 23

PT 선생님: 이제 끝내야 하니까 회원님 혼자서 이걸 5세트 하세요.

나: 왜 5세트죠? 너무 말이 안 돼요. 4세트만 하면 안 될까요?

PT 선생님: 회원님이 그렇게 약한 소리 하시면 안 되죠

나: 그럼 강하게 말하겠습니다. 4세트만 할게요.

 

 

3. 몰랐던 것을 알게 된다

2015. 7. 16

나: 선생님, 저는 딴 건 필요 없고 배만 좀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PT 선생님: 간단합니다. 배를 넣고 다니면 됩니다.

나: 켁 그게 다입니까?

 

2016. 9. 6

PT 선생님: 오늘 컨디션 어떠세요?

나: 힘들어 죽겠어요. 운동하면 체력 좋아질 거라고 하셨는데 소용없는 것 같아요.

PT 선생님: 왜요?

나: 오늘 온종일 회의하느라 하도 말을 많이 했더니 피곤하긴 예전이나 마찬가지예요. 운동해도 달라진 게 없어요.

PT 선생님: 음... 입 운동은 안 했는데요? 당연한 거 같은데... 

 

 


나 자신을 재발견한다

사실 운동하면서 얻은 진짜 좋은 점이 있긴 하다.

육체적으로는 땅에 서 있을 때 '잘 서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내적으로는... 수십 년간 몰랐던 내 성격의 최대 장점을 찾았다. 나는 고통스러워도 참고 계속하는 능력을 가졌다. 남들보다 느려도, 하기 싫어도, 최선을 다해서, 꾸준히 한다. 그리고 내가 어떤 캐릭터인지도 발견하게 된다.

 

2016. 5. 5

PT 선생님: 주토피아 보셨어요? 거기 나무늘보가 나오는데 회원님이랑 진짜 비슷해요.

나: 뭐가 비슷한데요?

PT 선생님: 제가 '자 시작하겠습니다' 하면 보통 3~4초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 반응도 안 하시잖아요. 그런 다음 지금처럼 팔을 천~천~히 뻗어서 바를 잡고요. 그 다음 눈을 몇 번 껌뻑껌뻑 한 다음에야 역기를 들잖아요! 거의 한 10초 이상 걸리는데, 거기 나무늘보도 항상 반응이 몇 박자 느리거든요.

나: 허 참.. 힘들어서 그러는 거지 저는 정말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요!

PT 선생님: 그러니까 닮았다고요! 나무늘보도 늘 최선을 다하는 게 그 모양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