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산책 9] 숨겨진 차원

2013. 11. 19. 00:35리뷰
알 수 없는 사용자

'심리학 산책'은 UX 디자이너를 위해 심리학 책들을 총 10회에 걸쳐서 소개하는 연재입니다. 연재 의도와 전체 책 목록은 아래 글을 참고하세요.
[연재 소개] UX 디자이너가 읽어야할 심리학 책 10가지
숨겨진 차원 : 공간의 인류학
- 에드워드 티 홀 지음 / 최효선 옮김

The Hidden Dimension
- by Edward T. Hall



보이지 않는 대상, 공간

이 책의 주제는 사회적 공간과 개인적인 공간 그리고 그에 대한 인간의 지각이다. (p.33)

'숨겨진 차원'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의 본문 첫 문장입니다. 공간과 그에 대한 지각. UX 디자인을 말하면 그 대상으로 우리는 흔히 어떤 물리적 형체를 가진 제품, 또는 서비스에서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요소들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무엇 자체가 아니라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공간이라는 요소도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고정 형태의 공간에서 중요한 점은 대부분의 행동이 형성되는 틀이라는 점이다. 윈스턴 처칠 경이 "우리는 건물의 모양을 만들고 건물은 우리의 모양을 만든다"고 말했을 때 지적한 것은 다름 아닌 공간의 그러한 측면이었다. (p.168)

사실, 공간을 다루는 디자인 분야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건축이지요. 또 현대에는 환경 디자인, 공간 디자인과 같은 개념도 있습니다. 이런 분야에서는 공간이 인간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심도 깊게 고민해 왔을 것입니다. 이 영역을 UX 디자이너들은 종종 잊고 있습니다만 UX 디자인의 범위는 갈수록 넓어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공간과 관련된 제품 또는 서비스를 다뤄야할 일이 점점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심리학 산책'에서 이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문화인류학자인 저자 에드워드 홀은 '인간의 공간 사용에 관한 상호연관된 관찰과 이론'을 '프록세믹스(proxemics)'라는 새로운 용어로 정의하고 자신의 이론 체계를 펼쳐나갑니다. 그 속에는 문화인류학뿐만 아니라 생물학, 사회심리학, 언어학, 역사학 등 다방면의 연구 결과가 망라되어 있어서 읽는이에게 통합적인 관점을 가지도록 해 줍니다. 처음 출판된 것이 1966년인 이 책은 반세기를 지난 오늘날에도 관련 분야 사람들은 한번 쯤 읽어야 할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물과 인간

이 책의 앞부분에서는 공간과 관련된 동물들의 행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동물들이 다른 개체와 상호작용하는 행동은 개체 간 거리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 안에는 특정한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을 만났을 때에 점점 가까와지다가 어느 특정한 거리가 되면 도망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거리를 '도주 거리'라고 합니다.  도주하지 못한 상황에서 더욱 가까와지다가 어느 범위 안으로 들어오면 오히려 공격을 하게 되는데, 그 한계가 '치명적 거리'입니다.

이와는 달리 같은 종의 개체 사이에서는 '개인적 거리'와 '사회적 거리'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물들 중에는 떼지어 몰려다니면서 서로 접촉을 필요로 하는 접촉성 동물들이 있는가 하면, 가능한한 서로 접촉을 피하는 비접촉성 동물들이 있는데, 비접촉성 동물들이 개체 사이에 보통 유지하는 거리가 바로 개인적 거리입니다. 사회적 거리는 무리의 한계를 벗어나서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심리적 거리로서 한 집단을 결속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개체들의 밀집 정도가 그 동물 집단의 사회적 행동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으며, 특히 지나친 밀집 상황이 가져오는 병리적 행태를 '싱크(sink)'라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인간의 공간 지각과 행동을 설명하기에 앞서 이렇게 동물들로 시작하는 것은 인간의 프록세믹스가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깊은 본능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요소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적합한 공간사용에 대한 인간의 느낌은 뿌리 깊은 것이다. 그러한 인식은 궁극적으로 생존 및 건전한 정신과 직결된다. 공간 감각을 잃는다는 것은 정신이상이 되는 것이다. 긴급 상황에서는 반사적인 행동과 생각이 요구되는 행동의 차이가 생사를 판가름할 수도 있다. 이것은 붐비는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는 운전자나 포식자를 피해 다니는 토끼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이다. (p.166)

이런 점은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거리 구분 단계가 동물의 개인적 거리, 사회적 거리라는 구분 단계의 확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나, 밀집이 동물들에게서 문제를 일으키듯이 인간들도 지나친 도시화라는 밀집 상황에서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겪고 있다는 점을 보면 그렇습니다.

공간 지각의 복합성

인간은 공간을 어떻게 지각할까요? 공간은 눈으로 보고 파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이 공간을 느끼는 방법은 매우 복합적입니다. 예를 들어 공간의 입체적 원근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사람에게 두 눈이 필요하다고들 알고 있지만, 한쪽 눈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부록에 실린 제임스 깁슨의 원근법을 읽어보세요.)

더욱 중요한 사실은 공간 지각에 시각뿐만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시각에 상당히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감각 기관이 함께 사용된다는 점을 잘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청각, 후각, 촉각 등 다른 감각도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시각 외의 감각을 통한 경험도 일종의 공간 환경으로서 인식되고, 또 사회적 행동에 영향을 주는 공간적 요인으로서 작용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열 관련 감각이 거리에 따라 어떻게 사회적 행동에 활용될 수 있는지 보면 이렇습니다.

감정적 상태는 신체 여러 부위로 공급되는 혈액량의 변화에도 반영된다. ...(중략) ... 다른 사람의 신체 표면에 열이 오른 것은 세 가지 방법으로 감지할 수 있다. 첫째로 두 사람이 충분히 가까이 있을 경우에는 피부의 열 감지체를 통해서, 둘째로 후각적인 상호작용의 강화를 통해서(향수나 로션의 냄새는 피부온도가 올라가면 보다 먼 거리에서도 맡을 수 있다), 셋째로 시각적인 검사를 통해서이다. (p.102)

 이 책은 이렇게 다양한 감각 기관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원격 수용기관과 근접 수용기관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공간과 인간 행동

동물에서처럼 인간에게도 거리 구분이 있다고 말씀드렸죠? 에드워드 홀은 크게 4단계로 나누고, 그 안에서 각각 가까운 단계와 먼 단계로 세분하고 있습니다.

- 밀접한 거리(intimate distance) : 직접 접촉 / 6~18인치
- 개인적 거리(personal distance) : 1.5~2.5피트 / 2.5~4피트
-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 4~7피트 / 7~12피트
- 공적인 거리(public distance) : 12~25피트 / 25피트 이상

이런 거리 단계 구분에 따라 각각의 감각 기관이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한눈에 요약해서 보여주는 표가 있습니다.


거리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지각 경험이 이렇게 달라지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따라 적절한 거리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연관성이 맞지 않는 상황이 되면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불편하게 되거나 그 상황을 해소하는 쪽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죠.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불가피하게 모르는 사람과 가까이 앉게 된다던가 하면 어떻게 느끼는지는 우리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지요?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책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책에서는 더 많은 개념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공간의 형태가 사람들을 모이게 하거나 흩어지게 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요, 매우 흥미롭습니다.  
오스몬드는 철도 대합실과 같은 어떤 공간들은 사람들을 떼어놓는 경향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것을 사회원심적 공간이라고 칭했다. 이와는 달리 옛날 약국에서 볼 수 있는 칸막이 대기실이나 프랑스 노천 카페의 테이블 같은 공간들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을 사회구심적 공간이라고 칭했다.  (p.169~170)

프록세믹스와 문화

인간의 공간 역학은 동물들과 같이 본성적이기도 하지만, 그 반면에 문화권에 따른 차이도 상당히 크다고 합니다. 프로세믹스의 기본 구조는 대체로 유사하나 각 단계가 구분되는 실제 거리나 반응 행동의 세부는 문화권마다 다르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우리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류 전체의 공통점보다는 인간 종 내의 차이가 더 잘 느껴지는 것이 아닌 싶네요.

저자는 문화권에 따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별도로 2개의 장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 중 첫번째 장은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을 다루고 있는데, 미국인과 유럽인 사이의 차이도 있을뿐만 아니라 유럽 내에서도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많다고 합니다.

유럽에서 공간을 구성하는 주요 시스템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프랑스나 에스파냐에서 볼 수 있는 사회구심적인 '방사선의 별' 모양이고, 다른 하나는 소아시아에서 기원되어 로마인들이 도입하고 카이사르 시대에 영국에 전파된 사회원심적인 '격자' 모양이다. (p.215)

두번째 장은 일본과 아랍권에 대한 이야기인데, 혼잡과 밀집, 청각과 후각의 중요도, 프라이버시, 개입 등의 측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위의 2개 장 외에도 이 책의 곳곳에서 문화적 차이는 자주 언급됩니다.  앞에서 소개한 인간의 4가지 거리 구분을 설명할 때에도 저자는 미국 동북부에 거주하는 토박이를 대상으로 도출된 결과라는 점을 유의하라고 당부합니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를 생각하면 여기에 소개된 문화적 내용이 지금은 다소 달라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문화권에 따른 상대적인 차이의 경향성은 여전히 유효할 것으로 봅니다. 지난 달의 심리학 산책에서 다룬 '생각의 지도'에서도 보았듯이, 문화적인 요소는 사회화라는 학습 과정을 통해 대를 이어 전달되면서 지속적으로 유지되니까요.

UX 디자이너에게

프록세믹스에서 인간이 동물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공간 환경을 만들어가면서 자신의 지각과 행동을 제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주요한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인간은 자신의 연장물들을 발달시킴으로써 스스로를 길들이고 나아가 자신의 감각들을 차단시켜 보다 좁은 공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p.265)

그 결과의 대표적인 존재가 도시이겠지요. 그래서 도시에는 밀집 상황의 문제를 감소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럼에도 도시는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죠. 저자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프록세믹스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연장물들은 감각이 없고 대개 말도 없기 때문에 특히 자연환경을 형성하거나 대체하는 연장물에 대해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그에 대한 피드백 장치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p.270)

저자가 말하는 '연장물'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건축과 갈이 물리적 공간 환경을 만들거나 그것에 영향을 주는 요소도 있겠고, 물리적 공간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않지만 공간에 대한 인간의 지각을 변화시키는 요소도 포함될 것입니다. 이런 요소들이 구체적으로는 실제 세상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에 연관된 문제들이 어떠한지, 그 문제들을 UX 디자인의 관점에서 해결할 방법은 없을지도 함께 생각해 봅시다.

문제와 해결 방법들을 생각해 보려면 인간의 공간 지각과 행동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하겠죠. 어떤 공간이나 다른 사람과의 거리에 대해 시각뿐만 아니라 다른 감각 기관을 통해 느꼈던 경험에 대해 떠 올려 보세요. 또 사람들 사이의 거리에 따라 행동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관계에 따라 거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해서도 우리 주변의 경험을 살펴보면서 미국, 유럽, 일본과 비교해 봅시다.

이렇게 UX 디자이너로서 생각해 볼만한 문제를 다시 간단히 정리해 봅니다.

생각해 볼 문제
- 시각과 다른 감각 기관을 통해서 공간이나 다른 사람과의 거리를 어떻게 느껴본 경험은?
-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와 사람들 사이의 거리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떠한 모습을 보이나?
- 인간의 공간 지각과 행동 측면에서 불편하거나 문제를 느꼈던 상황이 있다면? 어떤 요소 때문이었을까?
- 그런 문제가 잘 해결된 사례가 있는지? 이 책의 개념과 이론들로 해결해 본다면?

[참고##심리학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