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5. 21. 07:55ㆍUI 가벼운 이야기
프로젝트의 PM으로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가, 2013년 처음으로 한 해 동안 프로젝트를 맡지 않았다. 그리고 2014년부터 여러 프로젝트에서 코칭을 하다보니 이제야 회사 사람들이 일을 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보이게 되었다(참 바보같이 늦은!). PM을 하면 항상 내가 하는 프로젝트에만 빠져있는 스타일이라 주위 사람들을 못 보는 편이다. (다행히 우리 회사는 이런 나와는 달리 주위를 잘 살피는 리더들이 많다) 그러니 PM을 하면 신입들과 함께 일을 해도 '왜 저 사람이 저렇게 일을 하는 걸까?'라는 고민 보다는, 내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서 결과만 잘 나오도록 유도하는 것이 초점이었다. 즉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일이 우선이었다.
2014년부터 코칭을 하면서, 이제 언제나 '일'을 챙기는 PM은 따로 있다보니, 주로 이 프로젝트에 올 수도 있는 '위기'를 예측해 미리 알려주는 일을 주로 하면서, 팀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관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알게된 매우 흥미로운 깨달음을 공유하려고 한다. (물론 피엑스디에는 나보다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많지만, 그리고 피엑스디 바깥에는 더더 많겠지만, 그래도 용기를 갖고 공유해보려고 한다)
허허 벌판에서 도구를 만들어내다
처음 UX를 배울 땐 세세한 도구가 없었다. 크게 퍼소나, 컨텍스츄얼 인쿼리 같은 방법들이 있었는데 이런 방법들을 그 창시자에게 직접 배울 수 있는 행운을 얻었기에, 누구보다 그런 도구들이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꽤 깊이있게 배울 수 있었다. 그걸 피엑스디를 설립하면서 회사 동료들에게 가르치고, 또 후배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사실 나는 배우면서 이 이상 세밀한 도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똑같이 가르쳐 주어도 더 잘 배우는 사람이 있고 더 못 배우는 사람이 생겼다. 그리고 더 잘 배우는 사람들 중에, (나와는 달리) 주변이나 후배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그들을 관찰하면서 왜 못 배우는지를 고민하고, 무엇을 통해서 더 잘 배울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지금의 피엑스디 팀장/그룹장들은 그렇게 나무 한 두 그루만 있는 허허벌판에서 그 나무들을 깎아 도구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다.(그래도 내가 재료는 주었다고 생각한다) 후배들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표준적인 매뉴얼을 만들고, 각 부분에서 자료를 축적하고, 시각적인 도구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필요한 포스트잇도 직접 만들고, 퍼소나를 만들 수 있는 보드와 스티커, 컨텍스추얼 인쿼리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 등, 매우 다양한 유형 무형의 도구를 만들어 내니, 이제 사실 누구라도 피엑스디에 들어오면, 아니, 피엑스디의 워크샵만 들어도 꽤 곧잘 프로페셔널한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UX를 처음 배우는 초보 때는 이런 도구가 더 빨리 성장을 시켜준다.
그런데...
초보의 수준을 넘어서서 중급이 되려면, 이 도구들이 자신의 발전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포스트잇
예를 들어 대표적으로 생각나는 사례, 즉 여러 사용자의 목소리들을 포스트잇에 적어 붙인 뒤, 다같이 그것들을 분류하면서 어떤 굵직한 항목들이 있는지 찾아내는 작업을 생각해 보자.
처음 초보였을 때는 사용자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목소리를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난감한데, 이 때 포스트잇을 사용해서 이렇게 분류하는 방법을 배우고 나면, 매우 빠르게 정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결과도 꽤 그럴 듯 해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직관'을 훈련시키는 것인데(나중에 포스트잇이 없더라도 할 수 있도록) 그 가장 중요한 목적을 잃어버린 채, 기계적으로 포스트잇을 분류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난다.
점점 포스트잇에 의존하면서 내 머리를 안 쓰게 되는 것이다. 네비에 의존해서 운전하면 아무리 반복해도 길이 기억나지 않는다. 직접 자기 힘으로 지도를 보면서 찾아가게 되면 한 두 번 만에도 길을 기억할 수 있는데! 포스트잇은 보조 도구일 뿐이다. 같은 크기 같은 색깔의 포스트잇에 적혀 있다고 해서 그 아이디어들이 다 같은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며, 유사한 것의 수가 많다고 해서 더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 중요성과 디테일은 오직 그것을 적은 사람의 머릿속에만 있는데, 포스트잇에 적었다고 머리의 부담을 더는 순간 그 디테일은 다 사라져 버린다. 결국 남은 것은 기계적인 분류 뿐이다.
물론 포스트잇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제목을 조금 자극적으로 썼다. ㅎ)
하지만, 중급으로 성장하고 싶다면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머릿속이 복잡해 질 때 포스트잇에 적지 말고, 사용자 인터뷰 스크립트를 한 번 더 읽어 보자. 사용자가 한 말들을 모두(!) 다 머릿속에 우겨 넣고 내 머리에서 분류하고 컴파일해 보자. 그렇게 온통 자세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머릿속에 넣고 잠을 자면, 다음 날 아침에도, 혹은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아이디어들이 있을 것이다. 혹은 포스트잇 없이 남들에게 설명하려고 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포스트잇은 절대 알려주지 않는 중요한 아이디어다.(머리는 그러라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잇 도구를 만든 사람들이 "왜" 포스트잇을 활용하는 도구를 만들었는지, 생각할 수 있어야 중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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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인터뷰도 마찬가지다.
초보일 때는 무엇을 질문해야할지 막막하다. 그래서 질문을 만드는데 있어 피엑스디는 매우 발달된 도구를 가지고 있다. 축적된 사례도 많아서 비슷한 질문지도 수없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줄기 질문을 만들고, 그에 따른 가지 질문을 만들고, 5번의 왜를 묻고 등등, 컨텍스츄얼 인쿼리보다 더 자세한 지침들이 있어서 그대로 따라한다면 제법 괜찮은 인터뷰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지침과 도구에 따라 질문을 만들고 질문하면서, 질문의 흐름을 만드는 자신의 직관을 훈련시켜야 하는데, 도구에만 빠져 따라가다보면 그 도구 이상으로 성장을 못 한다. 처음엔 도구가 도움이 되지만 나중엔 도구가 질곡이 된다.
중급이 되려면, (이제 충분히 도구를 따라해서 두려움이 없어졌다면) 인터뷰를 앞두고 차분히 앉아서, "나는 무엇이 궁금한가?"라는 포커스 하나에 집중해 보자. 다시 반복해본다. "나는 무엇이 궁금한가?"라는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 그것 없이 그냥 사용자를 알아보자는 막연한 목표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그 포커스 하나를 선명하게 가지고, 인터뷰 질문지 없이 인터뷰를 해 보라. 컨텍스트와 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긴채, 진정한 "대화"를 통해 사용자가 말하고 싶은 것을 잡아 내라. 이것이 진짜 인터뷰다.
"왜" 선배들이 줄기 질문과 가지 질문을 나누었는지를 온몸으로 깨닫지 못 한다면 중급이 될 수 없다. 어떻게 아느냐고? 인터뷰를 하는 자기 자신을 관찰해보면, 인터뷰가 잘 되는 날은 어느새 줄기 질문에서 가지 질문으로 갔다가 다시 줄기 질문으로 돌아오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 내가 했더라도 도구를(요령을) 이렇게 만들어서 이렇게 후배들에게 알려주었겠는데?"라는 가벼운 억울함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때가 중급이다.
퍼소나
퍼소나 만큼 세부 사항을 많이 발달시킨 도구도 없다.
처음엔 어떻게 만들어야할지 막막한데, 워크샵을 통해 대략을 배우고, 선배들을 따라 만들다보면 이제 인터뷰하고, 스크립트 만들고, 크리티컬 캐릭터리스틱 만들고, 사용자 별 스티커 만들어서 붙여 간 뒤, 이리 저리 사람들을 붙이다 보면 퍼소나가 어느새 만들어져 있다. 여기까지가 도구의 힘이다.
그러나 왜 퍼소나를 만드나? 그것은 자신의 관점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사용자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 그냥 사용자 모습을 대충 스케치하는 것이 퍼소나가 아니다. 물론 처음에는 이런 것이 쉽게 되지 않으니까 도구의 힘을 빌린다. 몇 번 반복하다보면 마음에 안정감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 이제 도구를 버려 보자.
인터뷰하면서 머리를 텅 비우고 받아 적지 말고,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에 초점을 맞춰보자. 아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구나. 이 사람의 특징은 이것이구나. 이런 것을 발견해야 한다. 인터뷰하면서 자기 머리로 "생각"을 해야한다. 한 명, 두 명, 인터뷰를 늘려 갈 때마다 머릿속에서 이 사람들을 계속 분류해 보자. 이렇게 몇 번을 하고 나면, 8명 인터뷰 기준으로 6명 정도 인터뷰 했을 때 대략 머릿속에 퍼소나가 만들어진다. 나머지 2명은 확인 질문만 하면 된다. 그리고 나서 문서를 만들어라. 퍼소나는 사람들의 행동과 태도에 대한 분류-라는 직관을 향상시키는 도구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기계적으로 분류한, 그래서 쓸모없는 퍼소나가 되어 버린다.
지금 만든 퍼소나의 특징 3가지만 말해 보라. 그 세 가지는, 정말 사용자 연구 없이 알 수 없는 것이었나? 그 세 가지는, 정말 이 프로젝트의 모든 중요 사항을 의사 결정할 수 있는 세 가지인가? 그 세 가지는, 누가 봐도 무릎을 탁 칠 만한 인사이트인가?
"왜" 퍼소나를 만드는가? 그냥 우리 회사 프로세스에 있으니까? 이렇게 기계적으로 만든 퍼소나는 고객 프리젠테이션 직후 바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쓸모가 없으니까.
프로세스
마지막으로 프로세스를 무시해라.
전체 프로세스야말로 가장 큰 도구이자, 가장 큰 함정이다.
피엑스디는 확립된 프로세스를 갖고 있어서 그에 따라 (많이 과장되게 표현하면) 머리를 비우고 노를 열심히 저어가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데, 그것이 초급이 중급으로 성장하는데 있어서 함정이 된다. 처음 PM을 맡은 뒤에는 유사 프로젝트의 프로젝트 북을 찾아(피엑스디는 이런 아카이빙이 잘 되어 있다. 이것도 함정이다) 그대로 따라가고 싶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해도 좋다. 그러나 계속 반복하면 성장하지 못 한다.
계속 질문하라. 왜 이런 순서로 해야하나? 목표는 무엇인가? 목표로 이르는 최선의 방법인가? 다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개선할 수 있거나 추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이렇게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질문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진정으로 자기 프로세스가 만들어진다.
우리는 어떻게 성장하나
모든 책임을 내가 질 때 성장한다. 즉 출근한 후 프로젝트를 머리에 담았다가, 퇴근할 때 회사에 두고 가는 방식으로 하면 즐거운 직장 생활은 되지만, 성장은 더딜 수 밖에 없다.
어떤 구성원은 이런 질문을 한다. "왜 외주 프로젝트로는 성장할 수 없을까요?"
내 답은 이렇다. "외주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니까 성장 못 하는 것다. 프로젝트에서 할 수 없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전체 프로세스를 어쩔 수 없이 따라 가야한다고 해도, 완벽 질문지를 미리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도, 나는 프로젝트에서 이렇게 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작은 실험 작은 변화를 해 볼 수 있다. 그런 것이 없으면 결국 아무것도 못 배운다.
그럼 지금 무엇을 해야하나?
다음 번에 포스트잇을 사용할 때, 인터뷰를 할 때, 퍼소나를 만들 때,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이 글에서 제시한 대로 위의 방법을 써 보자. 그러면 변화가 생길 것이다?
아니!
제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누가 하라는 대로 하지 말라는 것. 그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스스로 깊이 생각해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내라고. 그것이 설령 기존 방법의 반복이라도, 거기에서 자기만의 의미를 찾아내라고.
회사의 한 동료가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생각이 나지 않을 땐 공원을 산책해 보세요'라는 도구를 알려주었다고 하자. 물론, 생각이 나지 않을 때 공원을 산책해 보면 도움이 꽤 될 것이다. 그러나, '산책'이 아이디어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결국 아이디어는 자기 머리로 만들어야 한다. -전성진 이사
중급이라면 이제 누군가의 방법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방법, 혹은 같은 방법이라도 나만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프로페셔널이다. 그래야 비로소,
나는 디자이너다.
[참고##프로젝트 방법##]